김치의 역사
우리나라의 문화의 대부분이 중국의 영향을 받았듯이 김치 역시
중국에서 들어 와 우리 고유의 음식이 되었고, 그 후에 일본으로
전해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아니면, 자연발생적으로 우리나라와
중국에서 동시에 시작됐을 지도 모르지만 우리나라의 기록은 중국에
비해 훨씬 뒤진 게 사실이다.
중국의 기록을 보면 지금부터 2600∼3000년 전에 나온 중국 최초
의 시집인 「詩經(시경)」에 김치를 뜻하는 "菹"(김치 저)자를 포함
한 구절이 있고, 그 후 秦(진)나라(B.C 238∼207)에서 편찬된
「呂氏春秋(여씨춘추)」에도 신맛이 강하였음을 뜻하는 "菹(저)"자가
쓰여진 귀절이 있다.
또, 후한의 許愼(허신:A.D 100년경)이 편찬한「設問解字(설문해자)」
에 신맛의 채소와 초에 절인 오이를 "菹"라 했으며, 한말에 劉熙(유
희)가 편찬한 「釋名(석명)」을 보면 채소를 소금에 절여 숙성시키면
짓무르는 것을 막아 주는데 이것을 "菹"라 하였다.
이상의 자료들은 "菹"에 관한 단편적인 설명뿐인데 作菹法(작저법)
에 대해 구체적으로 수록된 것은 後魏(후위:A.D 439∼535) 말엽에
편찬된「齊民要術(제민요술)」이다.
"菹"에 관한 우리나라의 기록은 이조 중종13년(A.D 1518)에 편찬
된「訓蒙字會(훈몽자회)」에 있는데, 우리말로 '딤채'라고 부르고 있
다.
菹菜類(저채류)를 해석한 「林園十大誌(임원십대지)」(1764∼1845)
에는 「菹菜類(저채류)」의 예를 42가지로 하고 있어 김치류에 관한
우리나라의 기록 중에 가장 상세하며, 그 무렵에 출간한 한글로 된
요리책 「규합총서」(1759∼1824)를 보면 비로소 동치미, 섞박지, 동
섞박지 등의 만드는 방법이 상세히 실려 있다.
한편 세시풍속에 나타난 기록을 보면「京都雜誌(경도잡지)」에 무,
배추, 마늘, 고추, 소라, 전복, 조기를 버무려 담근 雜菹(잡저:섞박지)
를 당시의 서울사람들이 먹었음을 알 수 있다.
또 「東國歲味記(동구세미기)」의 기록에는 10월경에 김치담기를
'沈菹(침저)'라하여 국민에게 널리 보급되었는데 여름의 장담기와
더불어 국민생활의 2대 중요행사가 되었다고 한다.
그 밖에 11월경에는 무김치, 배추김치, 동치미, 섞박지, 장아찌김치
등을 많이 이용한 것을 볼 수 있으며「農家月令歌(농가월령가)」
(1835∼1849)의 기록을 보면 9월 경과 10월경에는 고춧잎 장아찌, 젓
국지, 무우장아찌 등의 김장을 연중행사로 했음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쓰는 '김치'는 沈菹(침저)에서부터 팀채-딤채-짐채-김채-
김치로 변한 것으로 추측되며, 김장이란 말도 "沈菹(침저)"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역사적 기록을 종합해 보면 김치류는 약3000년 전부터 중국에서
'沈歲(침세)'라는 이름으로 시작, 우리나라에는 삼국시대에 전파되어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를 거치는 동안 국내에서 생산되는 재료와
우리의 기호에 맞도록 종류와 제조 방법이 변천되어온 것이다.
오늘날과 같은 통배추와 고춧가루를 주원료로 한 김치류는 이조시대
중종 이후에 결구배추와 고추가 들어오면서 보급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김치라고 하면 상식적으로 속에 생선을 위시하여 여러 양
념을 넣은 배추의 통김치를 말하는데 옛날에는 이런 통김치를 중요
시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배추의 질이 좋지 않아서 통김치같은
고급김치는 담글 수가 없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김치가 오늘날의 형식을 갖추기까지는 기후, 풍토 등, 원료의 재배
조건이나 제품의 저장조건등 천연적인 환경 요소와 생활양식, 요리방
법 등의 다양화에 따른 것이다. 또 경제 및 교역의 발달과 채소·원
예육종 기술의 발달에도 영향을 받았고, 기타 정치, 문화 등 각 시대
상이 반영된 점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