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을프레임에가두다

정발장군은 임진왜란 초기의 
영웅이자 조선보다는 오히려 일본에서
더 유명한 장군이라고 한다. 

전후에 조선 통신사 황신에게 부산성 전투에 참여했었던 일본 장수 마쓰라 시게노부는 
"우리는 부산진 전투에서 좌절했다"라는 말을 했다고 하며 
프로이스(포르투갈 출신의 선교사,임진왜란당시 일본에서 활동)기록에도 
"거의 전원이 전사할 때까지 싸웠다", 
"국왕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히 높은 훌륭한 병사들"이라고 적고 있다. 

경기도 연천 출신의 정발장군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1592년 4월13일 
고니시(小西行長)가 이끄는 18,000명의 왜적이

부산으로 처들어올때  부산진 첨절제사로 부임중이었다.

총으로 무장한 6배이상의 적군과
끝까지 싸웠지만 몇시간만에 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기록에 의하면 성안에는 살아남은자가 없었다고 한다.
숫자에서도 많이 열세지만 변변한 무기조차 없이
거의 맨주먹으로 항전한 모습에 일본군도 많이 놀랐다고 한다.

아무도 살아남은자가 없었기에 
한동안 알려지지 않다가  전투에 참가하지 않은 백성들이나
왜구를 통해 먼저 알려지고 조사를 통해
우리가 알고있는 역사적 교훈으로 남게 된 것이다.

정발장군 시신 역시 발견되지 않았는데
장군이 타던 말이 전투할때의 상태 그대로
이곳 연천까지 왔다고 한다.
(개연성이 많이 부족하지만 그렇게 전해지고 있다.)

실제로 올라가는 계단 옆에는
의마총비가 세워져 있다.   

검은옷을 입고있던 이유로
'흑의장군'으로 불리기도 한다.

정발장군묘로 향하는 입구 안내판.
주변에는 후손들이 관리하는 사당과 건물들이 있다.
안내판을 보다가 영문이름에서 약간 불편한 감정을 느끼게 됐다.
미국식으로 적어놓다보니 우리말로 읽으면 '발정'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내가 민감한건지는 모르지만 좋은 방법이 있다면 바꿨으면 좋겠다.  

정발장군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연천군 미산면 백석리에서 출생하였고 자는 자고(子固), 호는 백운(白雲), 본관은 경주, 군수 명선(明善)의 아들이며 선조 12년(1579)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었고 해남 현감, 거재 현령, 위원 군수, 훈련원 부정, 부산진첨절제사로 부임하였다.

 

정발 장군묘로 올라가기전 우측에 충노용월사적비(忠奴龍月事蹟碑)와 좌측에는 열첩애향정려사적비(烈妾愛香旌閭事蹟碑)와 양경공묘소사적비(良景公墓所事蹟碑)가 있다.

조선 중기의 무신 충장공 정발장군묘(忠壯公 鄭撥將軍墓 1553∼1592)는 경기도 미산면 백석리 산34-1 에 위치한 경주정씨 제실의 서북쪽 소로를 따라 250m 정도 골짜기를 따라 올라가다 보면 해발 150m가량의 9부능선에 동향(東向)하여 위치하며 부인 풍천 임씨(豊川任氏)와의 합장묘이다

봉분은 원형으로 기저부에 높이 40㎝의 백색화강암 호석 20매를 둘렀으며 규모는 직경 394㎝, 높이 150㎝이며 여러 석물이 있었으나 도굴과 훼손되고 새로 건립한 상석과 향로석, 무인석, 망주석 등이 있고 비문은 송시열이 지었으나 소실되어 1982년 다시 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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