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을프레임에가두다

숭의전지를 지나 집으로 오는길 
오른쪽 언덕에 있는 신도비.
언젠가 꼭 올라가봐야지했는데 
2021년 봄에 결심을 실행에 옮기게됐다.
길 바로 옆이라 주차공간이 없는것이 아쉽다.
작은 공터에 차를대고 내리니
안내판과 함께 하마비가 보인다.
'대소인하마'라고 쓰여있는데
어른이나 아이나, 아니면 높은사람이든지 평범한 사람이든지
예를 갖추라는 뜻이 아닐까 해석해본다.

신도비(神道碑)는 '죽은 이의 평생 행적을 기록하여 묘 앞에 세운 비석.
'신도'는 묘 앞에서 입구까지 낸 길을 말한다. 

신도비가 보이는데
원래는 비각(신도비 보호용도)이 있었다고 하는데
한국전쟁때 소실되어 주춧돌만 남아있는 모습이다.
예술적으로도 훌륭한 신도비라고하는데
너무 훼손이 심해서 안타깝기만하다.
용의 모습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이곳 연천이 한국전쟁때 거의 대부분 북한쪽에 
속해있어서 치열한 격전지였다.
밀고 밀리는 전투에 사람은 말할것도 없고,
많은 역사유적들이 불타고 파괴되었다.
신도비역시 수많은 총탄 자국에 무슨 내용인지 
알아볼수도 없게 된 모습이다.

들리는 얘기로는 전시에 
마땅한 표적지가 없다보니 
눈에 보이는 많은 비석들이
타겟역할을 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사실여부를 떠나서 아픈 역사의 순간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교육의 현장이기도 할것이다.

동쪽에서 해가뜨면 언덕을 비추면서 
따뜻한 햇살을 오랜동안 받을수있는 
양지에 위치해있다.
구불구불 계단을 오르면서 풍수는 잘 모르지만
참으로 편안하고 아늑한 곳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부원군은 왕의 장인 또는 정1품공신을 말한다.
성종이 그의 딸을 왕비로 삼아 '정현왕후'가 되자
부원군(영원부원군)에 봉하여졌다.

경기도문화재자료 제137호
지정일 : 2005-12-05
위치 :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아미리 산131-1

 

대소인하마

평정공 윤호(1424(세종6)~1496(연산군 2))는 조선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자는 숙보(叔保)이고 영천부원군 삼산(鈴川府院君 三山)의 아들이다. 1447년(세종 29) 생원시에 합격하여 군기시주부, 의금부도사, 신창현감, 밀양부사, 양주목사 등을 차례로 역임하였고, 1472년(성종 3) 춘장문과(春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병조참판을 지냈으며, 그 이듬해 성종이 그의 딸을 왕비로 삼아 정현왕후(貞顯王后)가 되자 국구(國舅)로서 영원부원군(鈴原府院君)에 봉하여 졌다. 1488년 영돈녕부사에 이르고 이듬해 사복시제조를 겸하였다. 1495년(성종 25) 우의정이 되면서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고 궤장을 하사받았으며, 다시 영돈녕부사가 되었다. 

신도비는 영원부원군 묘(연천군 향토유적 제6호) 입구 하단의 도로변 하마비보다 약간 상부에 비좌와 백색대리석에 일석(一石)의 비신 및 이수(螭首)를 갖추고 서향해 있다.

평소에 성품이 검소하고 교만함이 없었으며 외척으로서 세도는 추호도 찾을 수 없었다. 저서로는 아들 탕로(湯老)와 공저인 『파천집(坡川集)』이 있으며 『구급간이방(救急簡易方)』이 남아 있다. 시호는 평정(平靖)이다.

「議政府右議政(의정부우의정) 鈴原府院君(영원부원군) 尹公之墓(윤공지묘)」
  

반응형

공유하기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naver band
loading